성장의 끝에서 시작된 질문
한때 우리는 성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경제 지표는 꾸준히 상승했고, 기술은 해마다 진보했으며, 사람들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믿음 아래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가 쏟아져 나왔다. 디자인 역시 이러한 성장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더 새롭고, 더 빠르고, 더 화려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곧 디자이너의 임무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성장이 멈추었거나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시대, 바로 저성장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저성장이란 무엇인가
저성장 시대란 단순히 경제가 둔화된 현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방식과 사회 전반의 가치관이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물건이 없어서 사지 못했고, 기술이 없어서 만들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넘쳐난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이 시장에 존재하고, 소비자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제품을 경험했다. 이제는 단순한 소유보다 '왜 이 제품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더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중요해졌다.
디자이너의 역할, 다시 정의되다
디자인 역시 이 변화에서 예외일 수 없다.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예쁘고 잘 팔리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대의 디자이너는 제품의 기능이나 형태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이 사용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며,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폭넓게 사고해야 한다.
양에서 질로, 속도에서 깊이로
성장 시대에는 '얼마나 많이 파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기업은 경쟁적으로 신제품을 출시했고, 디자이너는 더 많은 기능과 더 자극적인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는 그 기준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새롭다고 해서 제품을 사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제품과 정보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만을 선별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런 변화 속에서 디자이너는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가격 경쟁력보다 더 깊은 차원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본질로의 회귀
우리는 어떤 삶을 위한 디자인을 하고 있는가? 이 제품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용자에게 어떤 정서적, 사회적, 환경적 경험을 제공하는가?
저성장 시대의 디자인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는 미니멀한 사고방식은 단순한 스타일을 넘어 철학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디자인이 '속도'보다 '깊이', '양'보다 '질'을 지향해야 함을 의미한다. 디자인의 출발점이 '빠른 출시'에서 '지속 가능한 가치'로 옮겨가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윤리와 책임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한다. 우리가 디자인하는 제품은 단순한 소비재를 넘어 삶의 일부가 된다. 제품을 사용하는 동안 사용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사용 후에는 어떻게 처리되고 어떤 영향을 남기는지까지 고려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영역이 되었다. 디자이너는 이제 단순히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와 환경, 사람의 감정을 연결하는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진정성이 필요한 시대
더불어 저성장 시대는 디자이너에게 더욱 철저한 진정성을 요구한다. 성장이 빠를 때는 실수가 있어도 다음 제품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소비자는 브랜드의 태도를 예리하게 분석하며, 제품의 진정성과 지속 가능성, 사회적 책임을 함께 본다. 페이크 디자인, 즉 단지 외형만 바꾸거나 마케팅만 앞세운 제품은 금세 소비자에게 외면당한다. 디자인은 더 이상 가짜를 숨겨주는 포장이 아니라, 진짜를 드러내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디자인의 속도도 달라져야 한다. 빠르게 만들고, 빠르게 소비되고, 빠르게 버려지는 순환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오래 고민하고, 깊이 설계하며, 느리지만 단단하게 완성된 디자인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 디자인은 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품이 사용자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경험을 남기며, 삶의 어느 부분을 채우는지를 끝까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질문하는 디자이너
결국 저성장 시대의 디자인은 질문의 반복이다. 정말 필요한가? 더 줄일 수는 없는가? 오래 사용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 질문들을 거치며 디자이너는 더욱 정제된 사고를 통해 제품을 완성하게 된다. 그 결과물은 단순히 예쁜 물건이 아니라, 사용자의 삶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는 '작은 전환점'이 된다.
저성장, 전환의 시대
저성장 시대는 결코 정체의 시기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에 가까워지는 전환의 시기이며, 디자이너에게는 가장 창의적이고 중요한 시대다. 디자인은 이제 시장의 흐름을 따르기보다 삶의 깊이를 탐색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디자이너는 더 이상 성장의 속도를 앞세우는 대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삶을 바꾸는 언어, 디자인
디자인이란 결국 세상을 바꾸는 언어다. 저성장 시대는 그 언어가 더욱 정교하고, 의미 있게 다듬어져야 하는 시점이다. 우리가 만드는 디자인이 사람의 삶에, 사회의 구조에, 지구의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성장 시대 디자이너의 윤리이며, 사명이다.
이제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디자인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디자인은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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