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자주 되뇌는 말이 있다.
“Less, but better.”
디터 람스가 남긴 말이다. 그가 쓴 ‘좋은 디자인의 10계명’은 오래전부터 내 책상 앞에 붙어 있다. 하루하루 디자인 작업을 이어가면서, 가끔은 지치고 방향을 잃을 때마다 그 문장을 바라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처음 디자인을 배울 땐, 멋지고 아름다운 걸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눈에 띄는 형태, 눈길을 끄는 색상, 복잡한 디테일들. 어쩌면 ‘좋은 디자인’보다 ‘돋보이는 디자인’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정말 사용자에게 좋은 것일까? 제품이 가진 본질과는 멀어진 길을 걷고 있던 내게, 디터 람스의 10계명은 일종의 나침반이었다.
1. 디자인은 혁신적이어야 한다 – 그러나 기술의 진심을 담아야
람스는 첫 번째 계명으로 ‘혁신’을 말한다. 하지만 그 혁신은 ‘멋진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술의 진보’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요즘 제품 디자인을 하면서 자주 접하는 요구사항은 늘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형태다. 클라이언트는 ‘기존과는 다른 뭔가’를 원한다.
하지만 내가 진짜 혁신이라고 느끼는 건, 사용자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조용히 바뀐 구조, 더 가볍고 조립이 쉬운 설계, 혹은 더 적은 부품으로 동일한 기능을 구현하는 것이다. 기술이 바뀌었고, 그것이 사용자의 삶을 더 낫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디자인이 ‘제대로’ 되었다고 느낀다.
2. 디자인은 유용해야 한다 – 그리고 필요 없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때때로 클라이언트는 제품에 여러 가지 기능을 얹고 싶어한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이왕이면 터치스크린도 있고, 블루투스도 되고. 하지만 사용자는 정작 한두 가지 기능만을 제대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내부 기능을 많이 줄여서 정말 필요한 핵심 두 가지만 남긴 적이 있다. 클라이언트는 처음엔 걱정했지만, 실제 시장에 나간 제품은 사용자가 너무 편하다고 반응했다. 그때 느꼈다. 유용함은 기능의 ‘양’이 아니라 ‘정확성’과 ‘직관성’이라는 것을.
3. 디자인은 아름다워야 한다 – 그러나 억지로 튀지 않아야 한다
디자이너로서 외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미려한 선, 정갈한 비율, 조형적인 완성도. 하지만 한때 나는 너무 형태에 집중해서, 기능적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특정한 외형을 고집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아름다움은 기능과 조화를 이룰 때 진짜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불필요한 치장은 결국 디자인의 수명을 짧게 만든다. 내가 존경하는 디터 람스의 브라운 오디오 제품처럼,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한다. 그건 유행을 넘는 아름다움이다.
4.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한눈에 말이 되도록
얼마 전 스마트 제어기를 디자인할 때였다. 버튼이 많은 제품이었고, 기능이 복잡했다. 그런데 버튼 하나하나에 작은 아이콘을 붙이고, 조작선이 따라가도록 UI 설계를 바꾸자 테스트 사용자들이 아무 설명 없이도 작동을 잘했다.
디자인은 사용설명서를 줄여야 한다. 가능한 한 없어야 한다. 버튼을 눌러보면 바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이 와야 한다. 그게 디자인이 말하는 방식이다. 형태가 말을 해야 한다.
5. 디자인은 겸손해야 한다 – 사용자를 앞질러선 안 된다
가끔 디자이너는 ‘내가 다 알고 있다’는 태도를 갖기 쉽다. 특히 오랜 경험이 쌓이면 그게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현장에서 사용자와 대화를 하다 보면 늘 깨진다. 우리가 상상한 사용 방식이 실제와 전혀 다를 때가 많다.
겸손한 디자인은 사용자 앞에 나서지 않는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필요한 순간 자연스럽게 손에 들어오고, 기대한 대로 반응하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은 그런 것이다. 사용자가 ‘편하다’고 말하고, 아무 불만 없이 그냥 쓰는 제품.
6. 디자인은 정직해야 한다 – 할 수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한 번은 클라이언트가 제품을 더 고급스러워 보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금속처럼 보이게 플라스틱을 도색하고, 버튼에 쓸모 없는 LED를 달자는 얘기도 나왔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제품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꾸미는 건 사용자에 대한 기만이다.
정직한 디자인은 ‘겉보기’보다 ‘속’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오히려 재질을 숨기지 않고, 단순한 구조를 드러냈을 때 신뢰가 생긴다. 그런 디자인이 오래 살아남는다.
7. 디자인은 오래가야 한다 – 유행보다 본질을
10년 전 디자인한 제품이 아직도 고객사 현장에서 잘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다. 그 제품은 처음 나왔을 땐 유행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기능적으로 완성도가 있었고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해 오래 써도 질리지 않는다.
유행을 좇아가는 디자인은 짧은 생명을 가진다. 하지만 본질에 집중한 디자인은 그 가치를 오래 유지한다. 특히 산업용 제품, 안전 장비, 공공 분야 디자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있는 조형이 필요하다.
8. 디자인은 철저해야 한다 – 작은 것도 그냥 넘기지 않아야 한다
언제나 마지막까지 긴장하는 부분이 있다. 나사는 어디에, 어떤 규격으로? 투명 창의 두께는 몇 mm로? 케이블이 지나갈 공간은 충분한가? 그런 디테일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양산에서 문제가 생긴다.
디자인은 '90%만 잘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디터 람스가 말했듯, 디자인은 모든 작은 디테일까지 사랑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도면 하나하나, 부품 하나하나를 눈으로 다시 확인한다. 그것이 쌓여 완성도를 만든다.
9. 디자인은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 그리고 책임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플라스틱, 전기, 포장재. 어떤 제품이든 환경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가능한 재활용 소재를 고려하고, 부품 수를 줄이고, 수리하기 쉬운 구조를 고민한다.
나 하나의 디자인이 환경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냥 쓰고 버리는’ 디자인보다는 ‘오래 쓰고 고칠 수 있는’ 디자인이 훨씬 정직하다. 나는 그런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
10. 디자인은 가능한 한 적게 디자인해야 한다 – 그리고 더 나은 결과를 만든다
결국, 가장 공감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Less, but better.”
처음엔 두려웠다. 무언가를 빼면 허전해 보일까 봐, 기능이 모자라 보일까 봐.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하게 된다. 덜어내고 비워낸 자리에 진짜 필요한 것만 남는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 사용자 경험이 들어온다는 것.
이제는 디자인을 하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거 꼭 필요한가요?”다. 좋은 디자인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덜어내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오늘도 책상 앞에 붙어 있는 디터 람스의 10계명을 바라본다. 내 손끝에서 나오는 하나의 선, 하나의 버튼, 하나의 재질 선택이 그 계명 중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자문하며 디자인을 이어간다.
나는 오늘도 적게 디자인하고, 더 나은 결과를 만들고 싶다. 그게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다. 그리고 HOONSTUDIO가 추구하는 디자인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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