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디자이너로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요즘 트렌드가 뭐냐”였다.
어떤 스타일이 잘 나가는지, 어떤 분야가 돈이 되는지, 어디에 사람들이 몰리는지.
처음에는 그 질문에 민감했다.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뒤처질 것 같았고, 남들이 선택하는 방향이 곧 정답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한동안은 나도 나비를 쫓듯 움직였다.
의료기기가 뜬다고 하면 의료기기 쪽을 더 강조했고, 로봇이 주목받는다고 하면 로봇 디자인 사례를 전면에 내세웠다. 링크드인에 글을 쓰면서도 ‘어떻게 하면 더 눈에 띌까’를 먼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불안했기 때문이다. 일이 줄어드는 시기에는 더 그랬다. 시장이 어려운 건지, 내가 부족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는 나비 한 마리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나비를 따라가느라 정작 내 자리에서 무엇을 피우고 있는지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제품디자인은 유행을 좇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내가 해온 산업용 장비, 의료기기, 방위산업 제품 같은 분야는 더 그랬다. 화려한 렌더링 한 장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구조와 사용 환경, 생산 조건을 이해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버튼 하나의 위치, 모서리의 곡률, 판금의 분할선 하나에도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건 트렌드를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태도와는 조금 다른 결의 일이었다.
꽃은 나비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이 피워낼 색과 향을 고민한다.
나에게 그 뿌리는 현장을 이해하려는 태도였다.
엔지니어와 끝까지 부딪히며 구조를 정리하고, 양산을 고려해 형태를 다듬고, 클라이언트의 기술이 어떻게 보이면 좋을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속도가 느려 보일지 몰라도, 그 시간 속에서 나만의 기준이 조금씩 만들어졌다.
한때는 일이 없으면 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프로젝트 수가 곧 실력의 증명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일이 많을 때도, 적을 때도 내가 할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디자인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내 언어로 내 일을 설명하는 것. 그 과정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결국 나를 지탱했다.
나비를 쫓으면 방향은 늘 바깥에 있다.
하지만 꽃이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질문은 안으로 향한다.
나는 어떤 제품을 잘하는가.
나는 어떤 태도로 일하고 싶은가.
HOONSTUDIO라는 이름 아래에서 어떤 디자인을 남기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편해졌다. 모든 프로젝트를 다 잡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와 결이 맞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산업용 제품의 묵직함, 의료기기의 긴장감, 로봇 디자인의 구조적 논리. 이런 영역이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자리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불안은 있다. 시장은 변하고, 발주는 줄어들고, 내부 사정으로 프로젝트가 보류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작정 나비를 쫓지는 않으려 한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글을 쓰고, 포트폴리오를 다듬고, 내 디자인의 방향을 다시 점검한다.
꽃이 충분히 피어 있으면, 필요한 나비는 언젠가 온다고 믿는다.
억지로 잡으려 하지 않아도, 향이 닿는 곳에서 누군가는 고개를 돌릴 것이다.
제품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긴 기다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견디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 자리에서 제대로 피어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꽃은 나비를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를 단단히 만든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디자인을 하며, 조용히 내 자리를 지킨다.
